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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책 소개

정유정작가님 종의 기원

by 돈마니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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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잠깐 할까요.

 

작가 정유정이 돌아왔다. 펴내는 작품마다 압도적인 서사와 폭발적인 이야기의 힘으로 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정유정이 전작 <28> 이후 3년 만에 장편소설 <종의 기원>으로 독자들을 찾았다.

 

작품 안에서 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선사했던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 정유정의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빛을 발한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종의 기원>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유정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악'에 대한 한층 더 세련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

 

주인공 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유진이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해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10년 전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은,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책속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P. 7

[첫문장] 태양이 은빛으로 탔다. 5월의 여울 같은 하늘 아래로 띠구름이 졸졸 흘러갔다. 성당 안뜰을 에워싼 설유화 꽃가지들 속에선 휘파람새가 울었다.

 

P. 92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나는 개미나 벌보다 못한 존재였다. 어머니에 따르면, 개미는 제 몸의 50배를 들어올리고 벌은 300배나 무거운 걸 운반한다지 않던가.

 

P. 125

네가 떠밀면 너도 떠밀리는 게 세상 이치야. 떠밀지 않고 떨밀리지 않는 게 정답이야.

 

P. 171

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그렇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추측항법으로 날아가는 제트기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마지막 주권 정도는 되찾고 싶었다.

 

P. 330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는 세가지 방식이 있대.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하는 거. 우리는 대두분 이렇게 살아.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P. 83

날카로운 충격이 맥박수를 훅 끌어올렸다. 명치 밑에서 이글대던 절망이 위액처럼 식도로 역류했다. 국국 소리가 구토를 하듯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소리는 웃음이 되어 피비린내 자욱한 집 안으로 탄환처럼 뻗어나갔다. 땀인지, 핏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턱 끝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살인자라니, 그것도 제 친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라니, 그짐승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니, 허둥대고 조바심치며 온갖 짓을다한 끝에 건져낸 게 이런 개 같은 진실이라니.

 

P. 139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P. 171

나는 눈을 감고 이마 한중간을 꾹꾹 눌렀다. 신음 같은 한숨이 샜다.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그렇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추측항법으로 날아가는 제트기는 되고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마지막 주권 정도는 되찾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상황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은 힘을 끌어모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둠속에 갇힌 2시간 30분을 내 앞으로 끌어내야 했다.

 

P. 283

이모 역시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를 등진 채 퍼걸러 테이블 앞에서 있는 건 이모가 아니라 장작개비였다. 어머니를 겁주고, 들쑤시고, 어르고, 뺨을 쳐서 나를 망가뜨리게 만든 요망한 장작개비.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P. 337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 됐다. 줄타기하던 줄에서 뚝 떨어진기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지 그랬어. 내가 사라질 동안만 참지 그랬어.가방 싸들고 옥상 철문으로 나가는 데 10분이면 차고 남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을 텐데. 너는 이토록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나는 너를 잃지 않았다고 믿으며 떠날 수 있을 테고.˝그래서 나는…침대보를 젖혀봤어. 나머지는......˝마침내 해진은 본론을 끄집어냈다.˝네가 설명해.˝

 

P. 378

보내주지 않은 덕택에 나 홀로 소망을 이뤘다. 비록 요트가 아닌 새우잡이 어선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죽을 만큼 고달팠지만 마음만은 편했다.오늘 아침 항구에 내리기 직전까지 머리 없는 짐승처럼 살았으므로, 세상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다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메일을 닫고 PC방을 나왔다.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P. 347

결국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내게 ‘감정‘이 존재하는한 그럴 수 밖에 럾었다. 감정의 무게를 없애면 선택의 무게는 신발을 사는 것만큼 가벼워진다.

 

P. 360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용기도 아니고 결단력도 아니었다. 탄수화물이었다.

 

P. 68

라디오라도 튼 것처럼, 귓가에서 주인공 로켓의 대사가 되살아났다.‘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예외는 곧 규칙이 되었다.‘어머니에게 아들은 나 하나였다. 그것은 규칙이었다. 예외였던 해진은 이듬해 3월, 어머니의 양아들이 되어 형의 자리에 연착륙했다. 예외가 새로운 규칙이 된 셈이다.

 

P. 135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의 눈금을 조금 낮추자 간단한 해결법이 보였다. 약을 먹지않으면 되는 것이다. 며칠 먹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나, 싶있다. 어머니가 노심초사하는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은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P. 161

달리기는 군도신시로 이사한 후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이었다. 목표점을 향해 전력 질주 한다는 점에서 수영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강과 바다를 교대로 바라보며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심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심장이 성난 사자처럼 날뛰는 것이 좋았다. 일상에선 그럴 만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설레거나, 긴장하거나, 불안을 느끼거나, 감정이 격앙되거나, 쾌감을 느낄 만한 일조차도.

 

P. 181

해가 저물 무렵, 너무나 지루했던 나머지 벽이라도 기어오르고 싶었던그때, 나는 지극히 당연해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아이든, 어른이든 인간에겐 갈 만한 곳과 할 만한 일이 필요하다는 것. 내겐 갈 곳이 없었고, 할 일이 없었다. 해야 할 훈련이 없는 시절, 해야 할 공부가 없는 하루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나고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영화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밤 9시면 귀가해야 했으니 하룻밤 유희조차 불가능했다. 가끔 어머니가 ˝넌 만나는 애 없니?˝ 라고 물으면 억장이 무너졌던 이유다.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세상 이치를, 뭐든지 다 아는 어머니만 모르고 있었다.

 

P. 203

불길 같은 흥분이 신경절을 타고 온 몸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기증이 났다. 내가 칼을 건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눈앞이 와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P. 206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모든 걸 알게 된 지금에 와서야 니는, 내가 살인을 저지르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기에 하구언 길의 위힘한 놀이를 그만두라고 스스로 경고했겠지. 그런데도 계속했던 건, 상상의 경계를 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사회적 자아가 견고하다고믿었다. 즐거운 한때와 인생을 맞바꿀 만큼 분별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도않았다. 나에 대한 과대평가, 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어젯밤 운명의 손에 내 목을 내주게 만든 것이었다.

 

P. 227

유진이 인생에서 중요한 건 수영 챔피언이 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무해하게 살 수 있느냐 아니냐, 라고.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의 목표, 혜원이의 치료 목적이 바로그것이었으니까.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사는 것.

 

P. 249언제나 소리 없이 움직이고 행동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쪽은 늘 유진이었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면 잔드시 표가 났다. 길을 가다가 멈칫해서 쳐다보는 사람도 꽤 많았다. 존재감이나 호감 같은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자성이었다.

 

P. 275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들어갑니다.

 




작품 안에서 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선사했던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 정유정의 상상력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빛을 발한다.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인간, 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악’에 대한 시선을 집요하게 유지해온 작가는 이번 신작 《종의 기원》에 이르러 ‘악’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유정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악’에 대한 한층 더 세련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라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체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_‘작가의 말’에서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는 것이 사건의 시작이고, 그 ‘누군가’를 밝히면서 드러나는 진실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과거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사흘(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흐를 뿐이지만, 독자들은 아주 낯설고도 특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누구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악’의 속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악’의 심연을 치밀하게 그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악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은 밖이 아니라 여기,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문장, 앞뒤로 꽉 짜인 이야기 구조가 발휘하는 특유의 속도감과 흡인력은 여전하다. 다만 서사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대신 1분1초도 헛되게 쓰지 않는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로 밀도감과 긴장감을 증폭시켰고,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깊어졌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한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마침내 내 인생 최고의 적을 만났다.
그가 바로 나다!”

주인공 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유진이 곧 시작될 발작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해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10년 전 자신의 집에 양자로 들어와 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해진은, 어젯밤부터 어머니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집에 별일 없는지 묻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 안과,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비로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것, 스스로 부른 재앙, 발작전구증세였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_ 본문 139쪽

16년 전, 열 살의 유진은 가족여행에서 사고로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의 형을 잃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준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거르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주목받는 수영선수였던 열여섯 살의 유진은 약을 끊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그 대가로 경기 도중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어머니는 유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없이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과 늘 주눅 들게 하는 어머니의 철저한 규칙,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 나쁜 이모의 감시 아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유진은 가끔씩 약을 끊고 어머니 몰래 밤 외출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밤 외출 후에는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하나씩 발견되는 단서들을 따라 지난밤의 기억들을 확인해나가던 유진 앞에, 시간을 거슬러 망각에 가려졌던 끔찍한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_ 본문 283쪽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로 ‘작가의 말’을 시작한다. ‘살인’은 인간이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이 무자비한 ‘적응구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며,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는 데이비드 버스의 논리는 살인과 악, 나아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곤 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의 어둠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묘사해 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돼 온 도덕과 교육, 윤리적 세계관을 철저하게 깨나감으로써 비로소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를 완성시킨 것이다.

폭풍을 피할 항구 같은 건 없다. 도착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폭풍의 시간은 암흑의 시간이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거기에 던져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과정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길고도 깊은 잠을 잔다. _ 본문 283쪽

작가는 우리의 본성 안에 숨은 ‘어두운 숲’을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의 기원》의 이야기가 그 어떤 낯선 세계의 이야기보다 낯설면서도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하고, 다양한 해석의 결로 저마다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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